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趣味/Documentary

[역사] EBS. 이집트 황금 제국의 비밀 - 2. 태양의 파라오들


시청일: 20081117

이집트 황금 제국의 비밀 - 2.태양의 파라오들

 파라오 아케나텐 - 유일신을 믿었던 사상 최초의 왕
 
아케나텐의 아버지인 아멘호텝 3세는 그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통치자였다. 아케나텐의 아들 투탄카문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보물과 함께 발굴되었다. 아케나텐 자신은 이집트 제국을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갔던 혁명을 시작했고, 세상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다.

 BC 1550 이집트는 100년동안 외세의 침입에 시달렸다. 그 이후 아흐모세와 카모세에 의해 외세의 침입을 물리치고 이집트는 강국이 되었다.

 BC 1390년 아멘호텝(아문신이 만족한다는 뜻)이 왕위에 올랐다. 아멘호텝 시대에 이집트는 더이상의 전쟁은 없었고, 부유했고 평화로웠다. 아멘호텝 집권기는 평화의 시대였다. 제국의 재산이 모두 아멘호텝의 국고로 들어왔다. 누비아의 금, 레바논의 삼나무, 아모톨리아의 은, 홍해 무역으로 아멘호텝은 부유했다.

┗이때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미탄니가 등장하여 이집트와 경쟁하였다.


 아멘호텝은 외교력으로 평화를 존속하고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1887년 한 시골 아낙이 이집트 아바르나 근처에서 비료로 쓸 묵은 진흙벽돌 찾는 중이었다. 그녀는 진흙벽돌 대신에 잘 보존된 여러 줄의 진흙판을 찾았는데,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외교문서였다. 그것은 아멘호텝 집권 당시 주변국과 주고받았던 외교문서를 적은 토판문서였다. 이 발견은 고대 이집트 정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다.

 외교문서, 바로 이것이 바로 아멘호텝의 성공의 열쇠였다. 아멘호텝은 외교력이 매우 뛰어났다. 서신을 살펴보면 아멘호텝은 선조들이 전투에 능했던 것 만큼이나 외교에 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당시 이집트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떨어져있던 나라에서 조차 이집트로 공물을 보냈다. 이집트 벽화에는 그 공물에 대한 내용이 그려져있다. 크레타의 미노스, 전설의 바빌론에서도 왔고, 누비아인은 기린과 사자, 시리아에서는 곰등 자국의 토종 동물이나 새를 보내기도 했다.
 이집트 왕은 그 당시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였다. 그리고 스스로 "왕중왕"이라고 불렀다.

 이집트의 외교력은 금에서 나왔다. 이집트에 공물을 바쳤던 나라는 이집트의 금을 갈구했다. 이집트는 이렇게 쌓인 부를 세계적인 건축물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아멘호텝의 성공에 대해 특별히 감사한 신은 바로 아문 라 였다. 아문 라 신전에 아멘호텝은 자신의 재산 중 상당한 량을 헌납했다. 그리하여 아문 라 신전의 제사장이 아멘호텝의 권력만큼이나 비대해졌으나, 아멘호텝은 자신만의 업적만이 백성들의 귀에 들어가도록 조치를 했다.
 이집트에서는 예전부터 풍뎅이모양으로 조각된 돌이 부적으로 사용되었다. 아멘호텝은 이 돌을 대량으로 만들어 최근 자신의 업적을 세겨 이집트 전국에 유통시켰다.

 이 풍뎅이 반구는 일종의 신문역할을 했다.

 아멘호텝의 왕비 간택소식도 이 반구를 통해 외부로 처음 알려졌다. 이집트 파라오들은 하렘에 있는 수많은 후궁 외에도 정시를 두어야했다. 전통적으로 왕비는 가까운 친척중에 간택되었으나, 아멘호텝은 평범한 마부의 딸과 혼인한다는 소식을 이집트 전체에 알렸다. 그녀의 이름은 티였다. 티의 아버지 이름은 유야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투야이다. 티 왕비는 평범하지 않았다. 왕비의 흉상을 보면 매우 강인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멘호텝은 자신을 위한 신전 하나와 티 왕비를 위한 신전 하나를 나일강 누비아 지역에 지었다. 바로 살렙에 있는 신전에서 아멘호텝과 티왕비는 신으로 추앙받았다. 살렙신전 석주 밑단에는 잡혀온 누비아인을 세겨 누비아에 파라오의 힘을 과시했다. 아멘호텝이 누비아를 통치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누비아에서는 금이 나왔고, 이 금으로 이집트는 왕중왕으로 자칭할 수 있었다.

 아멘호텝은 아문 라 신전에 금을 헌납했고, 테베의 제사장들은 이집트 전체 부의 4분의 3을 관리했다. 테베의 제사장들은 아문 라 신의 뜻을 헤아렸고, 아멘호텝은 그 뜻에 복종하여야 했다. 아문 라 제사장의 힘이 파라오를 넘어서자 아멘호텝은 다른 신에 관심을 보였다. 그 신은 바로 떠오르는 태양신 아텐이었다.

 BC 1352년 외교의 천재이자, 위대한 제왕인 아멘호텝3세가 죽었다.

 뒤이어 즉위한 아멘호텝 4세는 종교개혁을 시도하였다. 선왕이 이미 종교개혁의 씨앗을 뿌린 셈이지만, 이집트는 종교개혁이란 변화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즉위 2년만에 이집트의 전통신을 모두 버렸다. 심지어 신들의 왕인 아문 라도 버렸다. 아문라신전은 폐쇄되고 제사장들은 쫓겨났다.

 아멘호텝 4세에게는 신이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떠오르는 태양신 아텐이었다. 아멘호텝 4세는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 신봉자였다. 오로지 아멘호텝 4세만이 태양신 아텐의 제사장이었고, 오로지 그만이 아텐신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아문신이 만족한다는 뜻의 아멘호텝을 버리고 아텐신을 숭배한다는 뜻의 아케나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테베에서 먼 북쪽지방에 새 수도인 아바르나를 건설했다. 그는 이곳을 태양의 지평선이라고 불렀다. 이곳에 절벽을 깎아 신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도결정을 번복할 수 없음을 천하에 공표했다. 아케나텐은 천도를 통해 테베에 거주하던 세력(제사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시키고 싶어하였다.

아마르나로의 천도


 아케나텐의 반려자는 네페르티티
 1912년 겨울, 독일의 고고학자 루드비히 보르하르트는 아마르나를 발굴하기 위해 왔다. 그가 그곳에서 네페르티티의 상이 발굴되었다. 보르하르트 교수는 그날의 일기를 한줄밖에 쓰지 못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직접 봐야한다." 네페르티티도 티왕비처럼 뛰어난 역할을 했다.

 네페르티티는 공주 6명을 키웠다. 이런 인간적인 왕실의 가족은 이집트사에서 전무후무하였다. 공주들이 왕과 왕비에게 올라타 노는 장면이나, 왕이 공주에게 입을 맞추는 광경을 묘사한 작품이 아케나텐 시대가 거의 유일하다.

 아마르나의 생활은 매우 평화로웠다. 이를 기리는 노래가 많이 불려졌는데, 그중 하나의 노랫말은 아마르나의 한 무덤에 새겨졌다. 이 노랫말이 어찌나 설득력이 있는지 성경에까지 기록됐다. 이 노랫말에서 아케나텐은 태양을 자연의 창조자로 찬송했다. 노랫말에는 나무와 동물, 이집트인, 심지어 외국인도 등장한다.

 "태양이 빛을 비출때 풀밭에 있는 새가 행복하고 나무와 풀이 푸르게 자란다. 모든 동물 무리가 노닐고 모든 새가 활동을 시작한 까닭은 태양이 솓았기 때문이다. 강을 헤엄치는 물고기도 태양을 향해 뛰어오르고 태양은 기뻐하기 위해 땅을 창조했다. 태양은 인간과 섯대 새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땅을 기거나 하늘을 나는 미물마저도 모두 창조했다."
=> 태양신이 생명을 창조했고, 태양신이 땅에 골고루 생명의 씨를 뿌렸다는 것이 주된 내용.

 재임 12년동안 아케나텐은 신에게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연로한 티 왕비마저도 제사에 참석하였다. 같은해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네페르티티왕비가 권력의 절정기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이집트 학자들은 이에 대해 큰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그 뒤로 티 왕비가 죽었고, 후궁하나와 공주 하나도 죽었다. 아케나텐의 상심은 이루말할수없었다.
 그 후12년간 슬픔에 잠긴 아케나텐은 권력의 비극적 종말을 서술하기 시작했다. 이집트 전통신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장 큰 곤욕을 치른 신은 아문 라였다.

+아케나텐은 사상 최초의 유일신 신봉자이자 사상 최초의 종교 박해자였다.

 아케나텐은 아버지 아멘호텝3세의 유품에서 조차 아문신이 언급된 부분을 모조리 파버렸다.
+아멘호텝의 뜻은 아문신이 만족한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아문신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렸다. 자기 아버지의 이름도 훼손했다.

 아케나텐의 잘못된 개인적 믿음으로 인해 이집트는 한 대(代) 만에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BC1336년 아케나텐도 세상을 떠났다. 아케나텐의 죽음으로 아텐교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아마르나의 무덤들은 공사가 중단되고 텅 빈채 버려졌다. 그리다가 만 벽화도 발견되었다.

 아케나텐이 죽자 보수세력이 이집트를 차지하였다. 아마르나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테베로 돌아왔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자 아마르나는 폐허로 변하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고작 9살인 왕 투탕카텐이 즉위하였다. 후궁소생이었던 왕의 이름 투탕카텐은 아텐의 살아있는 이미지란 뜻이었다. 투탕카텐은 파멸직전의 왕조와 제국을 물려받았다.

 왕이 어려서 전왕에게 배척당했던 사람들이 기회를 잡고 득세했다. 그들은 우선 왕의 이름부터 바꾸었다. 아문의 살아있는 이미지라는 뜻의 투탄카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의 실세는 제사장과 군인들이었다. 투탕가문은 아버지가 이집트의 신을 버리고 이집트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비난하였다. 투탕카문은 옛신과 옛신전이 회복되었고, 아문 라 제사장의 권력 역시 회복되었다.

 투탕카문이 19살이 되어 통치 할 수 있게 되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듯 했지만, 그해 투탕카문은 죽었다.

 투탕카문의 두개골 뒤쪽에 난 구멍때문에 살해설이 제기되었다.
§Think§ 내가 아는 바로 이 설은 2005년 CT촬영 검사로 부정되었다. CT촬영결과 투탕카문은 왼쪽 다리가 부러졌고, 그 바로 다음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머리 뒤에 난 구멍은 미라를 만들기 위해 용액을 주입할 당시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EBS다큐프라임.원더풀사이언스 - 과학, 미라에 말 걸다.080731]에 나온 내용이다. <요약 링크>

 아무튼간 투탕카문은 후세가 없었다.

 20세기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의 노력이 없었다면, 투탕카문은 이집트 역사에서 단역에 불과했을 것이다. 왕들의 골짜기에서 하워드 카터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무덤하나를 발견했다. 이 발견은 투탕카문의 재발견이자 사상 최고의 보물을 발견한 사건이었다. 3만 2천여점의 이집트 보물이 소년파라오와 함께 묻혀있었다. 마차 6대, 의전용 침대 4대를 비롯한 수많은 그릇이 있었다.

 투탕카문의 무덤은 완성품이 아니었다. 보물은 제대로 놓여지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분명 이는 정상이 아니었고, 이에 대한 단서는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옥좌 뒤에 단서가 있었다. 그곳에는 투탕카문과 왕비가 있었고, 태양신 아텐의 햇살을 받으며 앉아있었다. 대신들이 선왕의 치세를 말살하기 위해 선왕과 관련되 모든것을 투탕카문과 함께 매장한 것이다.

 투탕카문은 후손이 없어, 혼란을 가져왔다. 아케나텐, 네페르티티, 아텐의 기억들은 모두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