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趣味/Documentary

[역사] EBS. 이집트 황금 제국의 비밀 - 3. 람세스 2세

시청일: 20081120

이집트 황금 제국의 비밀 - 3. 람세스 2세

람세스 2세 - 67년간 제위

 BC 1327년 파라오 투탕카문 사망으로 강력한 이집트 왕조의 종말과 동시에 혼란기의 시작. 이집트는 단 200년만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였다. 그러나 투탕카문의 사망당시 가장 큰 문제는 왕위 계승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히타이트 제국이 이집트 북쪽에 자리잡고 이집트 북쪽국경을 넘보았다. 15세 정도였던 어린 나이의 람세스(태양신 라의 아들이란 뜻)가 즉위했다. 람세스는 평민 가문 출신으로 군인가족 출신이었다. 왕가의 혈통은 아니었고, 다만 왕가의 측근 가문이었다. 그러나 람세스 가문은 군사력을 통해 왕좌를 차지하였다.

 히타이트 족이 이집트 북쪽국경에서 전쟁준비를 했고, 이는 이집트의 위기이자, 람세스의 위기였다.



 제위5년. 카데시 Kadesh를 향해 히타이트가 침략했다. 이집트는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집트 군은 누비아인과 리비아인도 전쟁에 동원하였다. 이집트군은 초기 청동기문명정도의 군사력인 반면, 히타이트군은 철기문명으로 무장해 있었다.

 람세스 2세는 붉은 머리칼에 170cm이 넘는 키였다. 이는 당시 이집트 남성의 평균키보다 10cm가 넘는 것이었다.

 전쟁 동원된 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베두인족 두 명을 잡아 심문했을 때, 그들은 히타이트 군이 이집트 군이 있는 곳보다 더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었고 이들은 히타이트의 첩자였다. 람세스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판단착오를 했다.
 람세스 군은 두 명의 첩자를 더 붙잡았다. 그들은 히타이트가 바로 강 건너에 주둔하고 공격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람세스 군이 급히 전투준비를 하고, 증원부대를 요청했을 때 히타이트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집트군은 히타이트 군에게 패하기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그때 증원부대가 도착해 히타이트 군에 반격을 가했다.
 카데시 전투는 히타이트 인의 남하만 저지하는 선에서 종결되었다. 람세스가 기대한 눈부신 승리는 아니었다.
 이집트에 돌아온 람세스는 역사를 날조해 자신의 선전운동으로 활용하였다. 카데시 전투의 일화를 세길 수 있는 장인을 전국 신전에 보냈고, 증원부대가 아닌 람세스 본인으로 인해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었다고 선전했다.
 
 자국 내에서는 이러한 선전으로 자신의 지위를 굳혔으나, 람세스는 비밀리에 히타이트족과 협상을 맺었다.
(선전가 람세스 -> 정치가 람세스)

 카르낙 신전에는 협상의 필사본이 벽에 새겨져 있다. 두 나라는 지속적 평화에 동의했고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히타이트 왕의 딸과 람세스는 결혼을 했다. 이는 평화협정의 일부였으며, 히타이트 공주는 나일 삼각주의 새로운 도시 페르 람세스(람세스의 집이란 의미)로 시집왔다. 페르 람세스는 테베보다 북쪽, 나일 삼각주에 자리 잡아 히타이트를 견제하기 좋았다. 그리고 테베의 전통적인 고위관료의 힘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람세스는 후에 사후세계로 관심을 돌렸다.

 멀리 이집트 남쪽에 람세스의 영승을 기원하기 위해 봉헌된 장소가 있었다. 왕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산 위에는 접근이 쉽지 않은 마을 데르엘 메디나가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자급자족 공동체였으며, 이들은 파라오의 무덤을 전문적으로 짓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 비밀을 누설하면 안 되어, 항시 감시받았다. 왕가의 무덤에 대한 위치는 이집트의 극비사항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조각가 화가 등의 예술가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왕이 사후세계로 안전하게 가는 것이었다.

 람세스는 사후세계를 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데르엘 메디나 주민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덤은 람세스의 무덤이 아니라, 그의 부인 묘였다.
 BC1312년 람세스는 이집트 귀족 가문의 여인, 네페타리와 결혼해 왕비로 삼았다. 네페타리의 무덤은 이집트 최고의 무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르엘 메디나 마을에서 도자기 조각과 돌에 써있는 메모와 서신들이 발견되었다. 세탁물목록, 요리법, 뉴스, 시, 연애편지 등 다양한 내용 등 당시 사생활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고고학적 금광이라 말한다. 이곳의 모든 기록은 매우 자세하다.

 람세스가 40세때 자신의 무덤이 완성되었다. 그는 이집트인의 평균수명은 35세인 것을 생각할때 자신이 덤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명의 친딸과 결혼했고, 자식이 매우 많았다.

 왕위계승자를 찾고 나서 그는 새로운 건축 사업에 혼신을 다했다. 어디에서나 람세스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지도자 중의 지도자라는 호칭이 람세스의 상형문자 앞에 붙었다. 선왕이 세운 오벨리스크가 좋아 보이면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세겨 넣었고, 카르낙 신전에서는 그의 할아버지가 세운 넓은 홀에 대규모 기둥을 세우고 조각을 했다. 이 기둥에 파피루스 형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조각해 놓았다. 기둥 높이는 21m 폭은 1m 무게는 100t이 넘었다.
람세스 치세 절정기에 네페타리가 사망하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 네페타리가 죽은 후 람세스는 거대한 두개의 신전을 건설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해, 다른 하나는 아내 네페타리를 위한 것이었다. 바로 아부심벨 신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신전은 이집트 최남단 국경에 자리 잡고 있다.

 네페타리는 람세스에게 소중한 왕위 계승자를 남겼다. 그러나 람세스는 그의 12명의 왕자들이 그가 살아있는 동안 모두 죽어가는 비극을 경험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업적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전기관성격의 전기편찬원을 시켜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고 과장시켜 파피루스에 남겼다.
 
 BC 1213년 93세의 늙은 왕 람세스 2세는 병석에 누웠다. 치아가 모두 빠지고 입속에 종양도 있었으며, 척추골절과 척추측만증과 같은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67년 치세를 축하하는 행사 직전에 죽었다.



 후대 왕들은 람세스를 닮고 싶어 했지만, 결국 아류로 존재했다. 제국 말기 이집트는 해양 민족이라고 표기된 침략민족에게 시달렸는데, 이 해양민족은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진 히타이트 제국도 멸망시켰다. 동맹국가가 사라진 이집트는 풍전등화였다. 해양민족의 이집트 제국의 북쪽 공격으로 인해 교역로가 차단됐다.



 이집트는 점차 혼란이 생기고, 돈도 없어졌다. 무덤을 만드는 노동자에게 줄 돈도 없어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파업도 벌였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의 노동쟁의로 기록된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사람들은 도굴을 하거나 보물을 찾아나서는 일도 있었다. 람세스 대왕의 무덤도 도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원전 1080년에 이르자, 파라오의 묘들 속에 있는 보물들은 거의 바닥나 버렸다. 왕가의 무덤을 만들던 사람들이 도굴을 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붕괴가 시작됐다. 누비아도 독립하여 이집트의 금 채취를 막았다.

 카르나크 신전의 사제들은 파헤쳐진 무덤에서 40구의 왕족미라를 수거해 그들이 영원히 잠들게 될 비밀장소로 운반했다. 신왕국을 건설한 아흐모세, 투트모시스 3세, 람세스 2세 등 그들의 시신은 산등성이 동굴에 버려진 채 그곳에서 3000년간 잠들게 되었다.

 람세스 2세의 치세가 끝나고 채 200년이 되지 않아 제국은 몰락하고 람세스 11세를 끝으로 람세스 왕조는 몰락했고, 신왕조 시대는 막을 내렸다.